첫 직장에 대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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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의 시작

어젯밤 이메일로 신입 개발자로서의 첫 입사 제안이 들어왔다. 취업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 정말 빠르게 얻어낸 성과였고 회사에서 제시한 연봉은 정말 내가 이 돈을 받아도 되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과분한 액수였다. 하지만 밤을 새가면서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한 끝에 오늘 점심 때쯤이 되어서야 마음을 정하고 입사 거절 의사를 회신했다.

좋은 연봉을 두고 왜 거절했나 싶을 수 있겠지만 사실 연봉 제안을 받기 전까지는 갈 마음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10인 미만의 규모에 자체 서비스는 아직 준비 중이고, 비즈니스 모델이 아직 명확하지 않다보니 투자를 받지 않아서 정부과제를 받아가며 운영 중인 중소기업.

저런 조건이 무조건 나쁘다 할 수는 없지만 예전 직장을 나오면서 다음 직장은 반드시 더 큰 규모에 어느정도 체계와 조직문화가 갖춰진 곳으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그런 부분들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단점을 덮고서라도 갈 정도로 회사의 비전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표가 나를 마음에 들어하면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연봉을 제시하니 갑자기 모든 주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스펙에 비해 과분했던 거지 사실 그렇게 높은 금액도 아니었다...

연봉은 과연 최고의 복지인가

정말 신기한 건 연봉 조건이 좋아지니 다른 조건들도 좋아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전해들은 업무환경은 제대로 된 사수가 없고 실무는 나와 비슷한 실력의 신입 두 명이 주로 하게 될 상황… 그나마 위에 CTO와 기술고문이 있는데 두 분은 일주일에 이틀만 출근… 작은 회사고 정부과제를 진행하기 때문에 개발자가 직접 머신러닝 논문을 읽고 연구계획서를 써야할 수도 있는 가능성…

그런데 좋은 연봉을 제시 받으니 ‘그래도 위에 두 분이 실력있는 분들인 것 같아보이는데 전반적으로 관리를 해주면 배울 수 있는 점들이 있지 않을까?’, ‘어차피 좋은 사수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라는데 차라리 사수 없이 업무 주도권을 갖고 일한다면 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아직 회사 분위기나 상황이 어떤지 확실한 것도 아닌데 선입견 갖지 말고 1년만이라도 발을 담가보는 건 어떨까? 혼자 취준하면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실무 경험이라도 쌓는 것이 좋잖아’ 같은 합리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가장 고민되었던 부분은 해당 포지션 타이틀이 ‘머신러닝 엔지니어’라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ML 엔지니어 자리는 석사를 기본으로 요할 정도로 전문성이 필요한데 나는 게다가 컴공이나 수학, 통계 하물며 이공계도 아닌 완전 비전공자이다보니 ML 엔지니어가 되기를 희망하면서도 당장 해당 포지션을 얻기는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ML 실무 경험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떡하고 놓여지니 이게 썩은 동아줄일지라도 내가 잡을 수 있는 줄은 애초에 이것 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회사를 들어갔을 때 정말 험난한 환경이라도 일을 하면서 석사를 한다거나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성장할 수 있을만한 수만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하느라 잠에 들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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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만 보고 일하기에는 내 삶은 너무 소중하다

모든 조건과 가능성을 열어두고 고민하고, 인터넷 검색을 하고, 커뮤니티와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밤을 샌 뒤 결국 해가 뜨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종이 한 장을 펼쳐놓고 이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의 장점과 단점을 쭉 적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렇게 글로 적어내려가 보니 너무 쉽게 마음이 정리되었다.

정말 10분 단위로 입사와 포기를 두고 마음이 계속 줄다리기를 했는데 장단점을 글로 쓰다보니 장점은 겨우 쥐어짜내면서 단점은 물흐르듯 적고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결국 내 마음은 애초에 입사를 원하지 않았는데 연봉이라는 변수 하나가 모든 것을 바꿔놓고 있었고, 그 종이 안에서 연봉 하나만 빼면 그 아래 적힌 나머지 장점들은 의미없이 지어낸 것들이라는 걸 알게되었다.

MBTI 중 제일 까다롭고 생각이 많아서 직업만족도도 제일 낮고 연봉도 낮은 INTP 아니랄까봐 내 마음이 이렇다면 분명 입사를 하고 나서도 같은 고민을 매일 반복하며 고통스러워 할 게 불보듯 뻔하기에 간보지 않고 그냥 깔끔하게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다.

선택의 기준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짧은 시간 동안 깊은 고민을 하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겪었는데 입사 포기 메일을 회신하고 나니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한결 편안해졌다. 메일을 보낸 뒤 다시한번 작년에 퇴사를 결심하고 개발자가 되기로 하면서 적었던 일기를 읽었는데, 일기 속의 나는 ‘오늘의 나’에게는 없던 의지와 결연함이 보여 스스로에게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수 없이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보람도 있었고 다방면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항상 전문성에 대한 갈증으로 고민했었다. 그래서 리스크를 감수하고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라도 이상을 쫓아 나에게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기 위해 커리어 전환을 했던 것이었는데, 이 순간의 변수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세워둔 목표와 기준이 흔들려서 지금까지의 노력들을 모두 포기할 뻔한 것이다.

물론 순간의 판단으로 내린 수가 정말 악수였을지 아니면 신의 한 수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인지는 이 뒤의 미래를 겪어봐야 알게된다. 그럼에도 지금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순간 혹해서 둔 수로 만들어낸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평생 만족하며 살지 못했을거라는 것이다. 뒤를 잘 돌아보지 않는 나인데도 계속 후회하는 순간들이 그렇게 확신없이 결정을 했던 순간들이었고 그 후회들을 바로잡기 위해 지금 노력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내 자신을 배신할 수 없다.

고민을 통해 얻은 것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 확인하게 된 건 내가 관심있는 쪽은 역시 머신러닝 모델을 연구하는 것보다 모델을 활용한 실질적인 서비스 개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데이터 사이언스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도 나는 ‘머신러닝 엔지니어’가 서비스 개발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고 뱡향을 잡았던 건데 이번에 구직과정에서 회사들이 구하고자 하는 ‘머신러닝 엔지니어’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여전히 연구직에 가깝다는 걸 느꼈다.

사실상 내가 재미를 느끼는 부분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가공해서 모델을 학습, 튜닝시키는 과정 보다는 이미 완성된 모델을 가져다가 API로 기능을 붙여 사용가능한 서비스로 만드는 건데, 한 마디로 내가 희망하는 건 머신러닝 서비스의 백엔드 개발자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물론 분석 결과를 만들고 직접 모델을 만들어 kaggle에 입상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당장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의 범주에 뛰어들기보다는 백엔드부터 공부를 해서 점점 머신러닝 쪽으로 범위를 넓혀나가는 쪽이 더 맞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에필로그

혼자서 폭풍 같은 하루를 보내고 쉬려는 찰나에 전화가 한 통 왔다. 백엔드 포지션으로 지원해놨던 다른 회사에서 서류 합격이 되었으니 면접 일정을 잡자는 것이었다. AI 서비스를 개발하는 회사고 규모나 환경이 내가 사전에 세워놓은 기준에 맞기 때문에 기대하고 있던 곳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기분이 살짝 설렜는데, 한 곳은 입사 제안을 받아놓고도 하나도 안 기뻐서 밤새 고민했으면서 내가 진짜 일하고 싶은 회사는 서류 합격만 되도 이렇게 들뜨는 걸 보니 왜 그렇게 어렵게 고민했는지 조금 허탈해졌다. 다음 회사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첫 직장에 대한 구체적인 희망이 생겼으니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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